최근 한 케냐 남성이 평창과 평양을 구분하지 못한 여행사 직원의 실수로 평창이 아닌 평양에 내려 곤욕을 치뤘다는 보도가 화제다. 월스트리트저널(WSJ) 24일자(현지시각) 1면에 실렸으니 서양 독자들에겐 팔릴만한 뉴스였다. 한국에 사는 콩고민주공화국(이하 콩고) 출신 난민 욤비 토나씨는 이와는 반대의 경우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콩고에 남겨둔 아내에게 "평양에 가서 다시 연락하리다"라고 편지를 보낸 후 조국의 위협을 피해 허겁지겁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지만 콩고의 전 엘리트 정보 요원도 북한과 남한을 착각한 것이었다. 



"평양이 여기서 먼가요?" 

욤비씨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택시 기사에게 "평양이 여기서 먼가요?"라고 물었으니, 기사도 얼마나 황당했을까. "노노 평양 이즈 노스 코리아, 디스 이즈 사우스 코리아"란 기사의 말을 듣고 나서야 욤비씨는 자신이 남한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가 2002년,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올라섰을 때 토나씨의 한국 생활도 시작됐다. <내 이름은 욤비>는 그가 콩고의 정보국 요원으로 집권 세력과 반군의 '은밀한 거래'를 폭로한 후, 한국으로 도망쳐 2008년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의 시간을 기록한 책이다.


불법 체류자로, 외국인 노동자로, 때로는 그냥 "새끼야"로 불리면서 

그 시간을 욤비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6년이란 시간은 그냥 흐른게 아니었다. 한국에서 내가 가장 먼저 맞닥뜨린 것은 외면과 의심, 그리고 거부였다. 불법체류자로, 외국인 노동자로, 때로는 "새끼야"로 불리면서 고군분투한 시간을 버틴 뒤에야 나는 비로소 콩고에서 온 대한민국 난민이 됐다". 그는 일하던 공장에서 사장의 실수로 화재가 났을 때 방화범으로 몰렸다. 새벽에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팔이 껴 사장에게 전화를 했을 땐 "이 새끼야 지금 몇 신데 전화야 내일 봐 내일"이란 말을 들었다. 한국엔 그를 호기심과 모멸감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는 대중과, 그를 동물 부리듯 착취하는 악덕 업자, 그리고 그의 난민 인정을 위해 함께 뛰어준 활동가들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난민이 난민임을 인정받기까지

1951년 제정된 난민협약과 한국이 1992년에 가입한 난민 의정서에는 조국으로 돌아갈 경우 인종, 종교, 정치적 의견 등으로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난민으로 규정한다. 의정서에 가입한 국가는 난민을 본국으로 강제 송환할 수 없다. 이번 달에만 배가 전복 돼 공식적으로 1,200명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아프리카 난민들이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탈출하는 이유는 이 조약 때문이다. 콩고 감옥에 갇혀 있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욤비씨도 난민이다. 그는 한국에 와서도 콩고 대사관 직원들에게 신분의 위협을 당했다. 하지만 그가 실제 난민임을 인정 받기까진 6년의 시간이 걸렸다. 2013년 제정된 난민법에 따르면 난민 신청 후 6개월 이내 심사 결과를 고지해야하며(사안에 따라 연장할 수 있음), 6개월 이내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국내 취업을 허용하지만, 욤비씨가 난민을 신청할 땐 그런 제도가 없었다. 그는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그 기간을 견뎌내야 했다. 읽지도 못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제대로된 통역 보조도 받지 못한 채 말이다. 하지만 5년을 기다린 끝에 법무부가 내린 결과는 '난민 지위 불허'였다. 


"난민이지만 난민이 아닌 이 상황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난민 지원 기관인<피난처>의 이호택 대표는 직접 콩고에 가서 욤비씨의 사건을 다룬 기사, 피의자 심문 조서를 받아 법무부에 증거로 제출했었다. 그는 같은 자료를 가지고 법무부를 상대로 한 욤비 씨 행정 소송의 증인으로 참석했다. 김종철 변호사와 김한주 변호사가 6개월간 소송을 준비하고 도왔는데 김종철 변호사는 이후 난민을 지원하는 공익법 센터 <어필>을 차렸다. 욤비씨는 당시 법무부의 불허 소식을 듣고 제삼국으로 떠날 생각도 했었다. 한국에서 4년 동안 기다리다 불허를 받은 난민이 호주에서 몇 주 만에 난민을 인정 받았다는 이야기도 그 때 들었다. 욤비씨는 "난민이지만 난민이 아닌 이 상황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욤비 씨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그 어떤 사람도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욤비 씨는 당시에도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호택 씨의 법원 증언 중 이 부분은 "선명하게 들렸다"고 전한다. 그는 이 증언을 들으며 눈물이 핑 돌았단다. "그래, 나는 누가 뭐라 해도 난민이다. 소송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내가 난민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욤비 씨의 말처럼 그는 한국 정부의 인정과 관계 없이 이미 난민이었다.


"여보 애들아! 우리 이제 만날 수 있겠구나"

"이번 사건은 원고 승소하였습니다" 법무부가 패소했고 욤비씨가 난민임을 인정 받았다. 그는 6년의 기다림 끝에 한국에서 체류하며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6년 간 콩고 정글에서 박해를 피해 떨어져 산 아내와 아버지를 기억 못하는 세명의 자식과도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난민에겐 가족결합권이 있기 때문에 본국에 거주하는 아내와 자식을 불러들일 수 있다. 욤비씨의 아내는 콩고 정글에서 현금 3천 달러를 항상 품에 지녔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뇌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공항에 도착 후 아이들은 엄마에게 아버지란 말을 듣기 전까지 욤비씨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란 사실을 알고 와락 껴안기 전까지 말이다. 안타까웠던 것은 난민에게 법무부가 여권 대신 발급하는 여행증명서를 공항 출입국 법무부 직원이 알지못해 욤비 씨 가족의 입국 심사에서 실랑이가 있었단 것이랄까. 



욤비 씨와 가족들




열매 따다 벌에 쏘여도 다 잊는다.

욤비씨는 한국에서 이제 유명인사다. 난민 인정을 받기 전에는 <피난처>의 활동가로 강연을 하며 얼굴을 알렸고, 난민으로 인정을 받은 후엔 KBS의 <인간극장>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이후 공장 노동자를 거쳐 치과병원 외국인 환자 보조 직원으로, 지금은 광주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돼 대학에서 인권과 평화를 가르친다. 그는 치과 병원에서 근무할 때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성공회대학교 아시아비정부기구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는 난민을 인정 받기까지의 삶을 회상할 때 콩고 속담을 즐겨 사용한다. " '콩고 속담에 열매 따다 벌에 쏘여도 내려오면 다 잊는다' 는 말이 있어요. 내 몸을 봐요. 온몸이 상처투성이일 때도 있었어요. 그래도 나는 열매 여러 개를 땃어요. 난민 인정을 받았고, 가족을 만났고, 일자리를 얻었고 친구들도 생겼죠. 그러니 벌에 쏘인 상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처럼 운이 좋은 난민이 다신 없기를

하지만 욤비씨는 자신과 같은 난민이 다신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자신처럼 운이 좋은 난민은 없어야 한다며 "나 처럼 운이 좋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이 한국 사회가 바뀌길 바라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년 한국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난민 신청자는 2,896명이다. 한국 역사상 최고 수치로 이는 난민 신청을 처음 받았던 1994년 부터 2014년까지의 난민 신청자 총 누계인 9,539명의 30%에 달하는 수치다. 하지만 같은해 난민 지위를 인정 받은 사람은 1778명 심사 기준 5.2%인 94명에 불과했다. 내전을 비롯한 세계 분쟁의 화염 속에서 세계 난민은 5천만 명에 도달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한국도 이 난민들의 실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디론가 가야한다면 우리나라도 그들의 피난처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인 559명이 다른 나라에서 난민으로 살고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난민들이 사는 것 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다. 법무부 직원이 법무부가 발행한 여행증명서를 모르는 것은 물론, 내국인과 동일한 일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난민이 <고용지원센터>에 들어갔다 "외국인은 나가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한국의 난민 인식의 실태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여기에 다른 다민종, 다인종 국가에서 도망친 난민들의 삶을, 관련 경험이 없는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도 문제다. 하지만 이는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난민도 인간이고, 난민의 문제는 인권의 문제다. 한국보다 잘 살지 못하는 국가도 난민을 받는다. 욤비씨는 "'1980년 5월 18일 한국인들이 독재에 맞서 아니오'라고 외쳤듯 난민 역시 자유와 권리를 위해 자국에서 '아니로'라고 외친 사람"이라 말했다. 그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한국을 꿈꾼다 말했다. 


저작자 표시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TellYouMore 박태인 트랙백 1 : 댓글 1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