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래 프린스턴대 교수의 장편 소설 '척하는 삶'(1999)은 한국계 일본인 군의관의 시선으로 전쟁 속에 놓인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다룬다. 책을 펼치며 참상 속에 놓인 군의관의 헐떡거림이나, 일본군에게 참혹히 범해진 위안부 소녀의 절규를 맞이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작가는 미국 작은 시골 마을에서 백인 이웃의 존경을 받으며 살아가는 일본인 노인 닥터 히타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준다. 히타는 전쟁의 기억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전 일본인 군의관 고로의 두 번째 이름이다.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서구 사회 수면 위로 끌어올린,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는 영문 소설 '척하는 삶'의 내용 대부분은 평범한 노인 히타의 삶으로 채워져 있다. 



조그마한 의료용품 가게를 운영하며 두루두루 존경받는 현자 같은 노인. 히타는 자신이 전쟁과 위안부의 참상을 목격하지도 않은 양, 서양 소설에 등장하는 하나의 평범한 인물인 '척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랬기에 그를 존경하는 이웃 주민은 왜 히타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한국인 여자아이를 입양했고 왜 번번이 사랑에 실패하는지 알지 못한다. 전쟁의 죄책감이 강박을 낳고 결국 그 강박이 딸과의 불화로 이어지는 필연적 운명에 대해서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이웃들은 모든 이유가 히타 안에 있음에도 자신들이 규정한 히타를 벗어난 모든 것의 원인을 히타 밖에서 찾는다. 전지적 시점의 관점이란 특권을 누린 독자만이, 책 후반부에 드러난 고로로서 히타의 기억을 경험하고 전쟁과 위안부란 비일상적 경험이 한 인간에게 미친 영속적인 영향을 이해하게 된다.



이 책을 떠올린 건, 최근 논란이 된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 때문이다. 박 교수는 책에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위안부의 이미지, 즉 수요집회에 참여하는 투사로서의 할머니와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소녀의 모습이 전쟁 당시 실제 위안부와는 많이 달랐다고 주장해 한국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박 교수의 주장을 따라가면 당시 조선인 위안부의 평균적 나이는 20세가 넘었고 10세 소녀들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일본군에 납치당한 위안부는 소수에 불과했다. 



위안부 대부분은 조선인 포주와 인신매매단이 납치한 저소득층 여성들이다. 박 교수는 일본군이 위안부의 근본적인 수요를 초래했고 용인했기에 사죄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를 굳건히 유지하며 여성의 영속적 저계급을 초래한 조선 사회와, 자국 여성을 수익 수단으로 간주한 채 일본에 협력한 조선의 협력자들에게 비판의 화살을 가한다.



박 교수는 일본군을 악마화 하고 위안부를 주체성 없는 완벽한 수동적 피해자로 묘사하는 것은, 위안부에 동참한 조선의 수많은 매춘업자와 그녀들을 지켜내지 못한 가부장적 사회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란 입장을 피력한다. 



또한 이는, 제국주의적 모순, 1965년 한,일 협정에서 식민지 사죄를 요구하지 못한 냉전 체제 속 한국 정부의 한계를 덮는 효율적이고 편리한 국가주의적 발상이라 말한다. 박 교수는 이것이 위안부를 위안부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들어 역설적으로 생존했든 혹은 이미 숨을 거둔 위안부 할머니를 억압하고 있단 논지를 펼친다.



박 교수는 또한, 전쟁 당시 조선인 위안부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기존 시각관 판이한 견해를 제시하며 또 다른 논란도 촉발한다. 조선인 여성이 일본 제국주의란 "보조적인 강제성"에 희생자라 말하면서도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이 침략한 타국 여성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고 전쟁의 폭격 속에서 일본군과 함께 숨을 거둔 '제국의 위안부'란 것이다.  



박 교수는 "전쟁터에서 강간의 대상이 된 '적의 여자'와 위안부는 군과의 관계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였다"고 말한다.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이 승전을 거뒀던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지역 여성들과 달리 "두 번째 일본인"의 지위를 누렸다고 주장한다



책에선 일본 식민지의 일원으로서 전쟁에 참여했고 일본 군인과 사랑에 빠지거나, 그들을 전쟁의 동지로 생각했거나, 그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제공했거나, 일본군 병사를 동정하는 위안부들의 목소리들도 담담히 적어 내려간다

  


이런 주장 역시 한국 사회가 위안부를 기억하는 방식과 완연히 배치된다. 위안부란 단어 앞에 '제국의'란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권력자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작년 6월 박 교수는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위안부 할머니 아홉 명에게 고소를 당한다. 당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형사 고소, 2억 7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 소송,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접근 금지와 <제국의 위안부>판매 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8개월 후 법원은 가처분 신청에 대한 원고 측 주장 일부를 받아들여 원고 측에서 수정 신청한 53곳 중 34곳을 삭제하지 않고는 <제국의 위안부> 출간을 금지했다.



접근 금지 요청은 기각됐으며 민사 소송은 16일 1심 재판이 끝났고, 형사 소송은 검찰이 지난달 18일 박 교수를 기소해 1월 중 재판이 열릴 예정이다. 법원 판결 후 재출간된 <제국의 위안부> 2판엔 34곳에서 문맥과 문맥을 잘라 놓는 여과 없는 숨김표(O)가 등장한다. 



박 교수는 법원의 삭제 명령이 반영된 '제국의 위안부' 2판을 내놓으며 '제국의 위안부'란 표현이 조선인 위안부를 제국주의의 협력자나 친일파로 묘사하려는 뜻이 아니었음을 밝힌다. 



위안부의 근원적 수요를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죄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나 "일본이라는 고유명에 대한 집착은 국가와 남성과 지배층 일반의 책임" 추궁을 어렵게 만들어 결국 책임의 물타기를 초래한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우리 안의 위안부는 그저 가녀린 소녀 아니면 노구를 이끌고 투쟁하는 투사일 뿐"이며 "그건 그녀들 자신의 모습이 아닌 우리가 원한 위안부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이런 식민지의 모순을 이해해야만 위안부의 진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단 것이 그 요지다



이어,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현재의 '부정확한 이해'는 위안부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 우익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했던 지한파마저도 돌아서게 했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박 교수의 주장처럼 이런 다층적 이해는 꼬일 대로 꼬여버린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박 교수가 말하듯이 위안부에 대한 총체적 책임이 결국 그 수요를 창출한 일본군 제국주의에 있다면, 그들에게 협력한 조선의 협력자들을 단죄하는 것은 오히려 총체적 책임자인 일본군에게 일종의 면죄부로 작용하진 않을까.

 


'척하는 삶'에서 고로(히타)는 싱가포르 일본 군기지로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 여성의 건강 관리를 맡았다. 고로는 그중 유별나게 아름답고 고귀해 보인 끝애라는 조선인 여성을 사랑했다. 넷째이자 막내 여자 아이로 태어나 부여 받은 '끝애'란 성의 없는 이름. 박 교수가 위안부의 요인으로 지적한 조선의 가부장적 사회 구조가 드러난단 측면에서 소설은 현실과 맞닿아 있다. 



고로는 끝애를 구해내지 못한다. 끝애는 자살을 원했다. 고로는 억지로 그녀를 구해내려 했다. 하지만 실패한다. 일본군 장교와 병사는 끝애를 윤간한 후 그녀가 자살하기 전 살해한다. 끝애는 고로를 착한 일본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죽여 달라고 했다. 그런 고로는 끝애와 서양 소설에 등장하는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싶었다.    



결국 고로는 히타로 이름을 바꾸고 미국 시골 마을에 정착한다. 사죄의 의미였을까. 평생을 결혼하지 않은 그였지만 고로는 한국인 소녀를 입양해 열심히 키운다. 불화로 두 부녀는 갈라서지만 소설 말미에서 작가는 두 사람 사이에 화해의 기운을 살짝이나마 드러낸다. 



'제국의 위안부'는 박 교수를 비난하는 이들의 주장과 달리 조선인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표현치 않았다. 그렇다고 위안부의 이미지를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간 소녀로서 한정치도 않는다. 



일본군과 위안부가 "국민동원이라는 국가 시스템 속에서 함께 움직여진 장기말,한 마리의 개미들"이란 화두를 던지지만 "위안부가 군인과의 관계에서 희생자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단정한다. 



그럼에도 박 교수는 위안부 속에는 한국과 조선이 기억하길 원치 않았던 다양한 모습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동지적 관계'든 '전우로서의 관계'든 연인으로서의 관계'든 말이다. 



그녀는 위안부 문제에 감정을 가진 한국과 일본 독자에게 1인칭 관점을 넘어 전지적 관점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조선인 위안부의 다층적 모습을 이해하는 것이, 한국과 일본이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할 이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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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ellYouMore 박태인 트랙백 1 :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