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존경하는 한겨레의 조현 종교 전문 기자가 2011년 3월 한달 동안 '기독교 개혁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훌륭한 기독교 기획 기사를 써내셨습니다. 루터와 칼뱅부터 시작해 현재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까지 총체적으로 짚어낸 좋은 기획 기사 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읽으셨으면 하는 바람에 제 블로그에도 올려 봅니다.

한겨레 신문 기사 원문 링크

1.루터의 외침, 부패한 교회를 일깨우다. -
http://bit.ly/fMaI0H

2.화형장의 후스, 종교개혁 불씨 되다. -http://bit.ly/gD4IHh

3.개신교 반석위에 올려놓고 교회의 소금으로 http://bit.ly/gEODGT

4. ‘오직 성서·믿음·은총’의 독 탓에 교회가 죽었다. -http://bit.ly/gD20Oh

[유럽 종교개혁지를 찾아서] <3> 개혁도 개혁한 칼뱅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좌우명
목사·교사·장로·집사 체계로 성직자 독단 차단


 
국제적십자사, 국제노동기구, 세계보건기구, 국제연합 유럽본부 등 200여 기구의 본부들이 있어서 ‘국제기구의 수도’라 할 만한 제네바.  ‘가톨릭의 수도 로마’만큼이나 개신교에서 중요한 도시다. 

 
칼 뱅이 제네바를 ‘프로테스탄트의 로마’로 만들기 위해 설교한 성피에르교회 아래쪽  바스티옹공원에 이르니 칼뱅의 석상이  ‘종교 개혁’의 세 동지와 서 있었다. 훤한 이마와 깊게 패인 눈, 흰 수염이 일상적 삶 속에서 경건한 영성을 구현하려 했던 ‘영성가이자 실천가’인 칼뱅의 풍모를 엿보게 한다. 바스티옹 공원 옆엔 칼뱅이 설립한 제네바아카데미(제네바대학)가 있다. 칼뱅의 종교개혁을 유럽에 전파한 사관학교다.



‘움직이는 종합병원’으로 병약하고 비사교적
 

암 울한 시대 상황과 어두운 교회 현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아는 칼뱅은 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칼뱅은 움직이는 종합병원으로 불릴 만큼 병약하고 비사교적이며 과묵했다. 그래서 사회적인 활동가로서보다는 홀로 학문하기를 좋아했다. 칼뱅은 그런 책상물림이었지만 시대의 어둠을 외면할 수 없어서 힘겨운 몸을 이끌고 세상 속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양심가였다.

 
칼 뱅은 자신의 건강이나 성향으로 보아 실천적이기보다는 홀로 학문하기를 즐겼지만 그의 아우라를 감지한 지인들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있던 파렐은 <기독교강요>라는 탁월한 저서를 쓴 이가 제네바를 지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찾아가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협박’을 하며 칼뱅을 끌어들인다. 훗날 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하며 한 미망인을 만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생애를 보내면서 조용히 살려던 칼뱅에게 “제네바의 돌들이 소리칠 때까지 거기에 있을 것이냐?”고 협박해 다시 끌어들인 것도 파렐이었다.



 
제네바에서 엄한 교회 규율과 제도를 정비한 칼뱅은 제네바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했다. 당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목도한 칼뱅이 성직자의 독단적 폐해를 막기 위해 목사·교사·장로·집사 등 4개 직분의 현 장로교 체계를 만든 것도 제네바였다. 이런 칼뱅을 통해 ‘종교 개혁 정신’은 마침내 개신교의 제도로 정착했다. 하지만 칼뱅은 개혁가였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cia semper reformanda)는 칼뱅의 구호는 부패하는 교회의 소금이 될 예언자들을 지금까지 깨우고 있다.


칼뱅은? 프랑스 출신으로 망명한 ‘장로교의 아버지’

한국 개신교회와 신자 수의 70%의 이상을 차지하는 장로교의 아버지는 장 칼뱅(1509~64)이다. 우리에겐 ‘칼빈’(영·미권 호칭)으로 익숙한 인물이다. 그래서 칼뱅은 한국교회에서 예수 다음으로 유명하다고 할 정도다.

프 랑스 출신으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한 그는 불과 23살에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에 대한 해석을 발표해 인문주의자로서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은 데 이어 25살에 복음주의 개신교의 고전 <기독교강요(綱要)>(Institute christianae religions)를 썼다.  <기독교강요>는‘ 가톨릭으로부터 모략당하고 박해받는 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자들의 무고함을 프랑스 황제에게 탄원하는 서문에 이어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그는 24살 때 종교개혁적 입장을 옹호한 니콜라스 콥의 파리대학 학장취임 연설의 작성자로 지목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껴 조국을 떠나 스위스로 망명해 제네바에서 ‘개신교의 제도’를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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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존경하는 한겨레의 조현 종교 전문 기자가 2011년 3월 한달 동안 '기독교 개혁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훌륭한 기독교 기획 기사를 써내셨습니다. 루터와 칼뱅부터 시작해 현재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까지 총체적으로 짚어낸 좋은 기획 기사 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읽으셨으면 하는 바람에 제 블로그에도 올려 봅니다.

한겨레 신문 기사 원문 링크

1.루터의 외침, 부패한 교회를 일깨우다. -
http://bit.ly/fMaI0H

2.화형장의 후스, 종교개혁 불씨 되다. -http://bit.ly/gD4IHh

3.개신교 반석위에 올려놓고 교회의 소금으로 http://bit.ly/gEODGT

4. ‘오직 성서·믿음·은총’의 독 탓에 교회가 죽었다. -http://bit.ly/gD20Oh

화형장의 후스, 종교개혁 불씨 되다 “진실만을 찾으라, 지켜라”
부패한 교회 향해 외쳐

“지금 거위는 불타 죽지만
100년뒤 백조 나타날것”
루터 등장 마치 예언하듯

독교 개혁의 발자취 그 현장을 찾아서 ① 제코의 후스, 목숨 건 항전

‘블타바(몰다우)강’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일본 강점기 때 눈물을 흘리며 연주했고, ‘프라하의 봄’(1968년) 기념식에서 빠짐없이 연주되는 스메타나(1824~1884·드보르자크의 은사)의 교향곡 <나의 조국>의 제2번 제목이다. 그 몰다우강을 가로지르는 길이 500미터의 카를교에서 밤에 바라보는 ‘높은 성’(교향곡 <나의 조국> 제1번곡 제목)에 우뚝 선 비투스대성당은 프라하의 제1야경으로 꼽힌다. 지난 3일 밤 몰다우강에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높은 성’(고성)과 프라하 주교좌성당인 비투스대성당의 아우라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킬 만큼 황홀했다.

               프라하 구시가지광장에 서 있는 얀 후스의 동상이 얀 후스가 설교했던 틴교회당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눈먼 순례객과 달리 그 이면의 진실을 냉철하게 본 인물이 있었다. 카를교 옆에 있는, 690년 전통의 프라하대학 총장이었던 얀 후스(1372~1415)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보다 100여년 앞서 종교개혁의 불을 댕긴 얀 후스는 보헤미아(체코)인을 위해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모국어로 설교하면서 성서와 달리 ‘교황을 우상시’하고 부패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한 죄로 화형을 당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29살에 프라하대학 철학부 학장, 37살에 총장이 되어 얼마든지 기존 교회와 황제와 영주 편에서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진리를 위한 ‘산제물’로 자신을 바쳤다.


카를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옛 시가지 광장에 ‘얀 후스’ 동상이 있다. 그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그가 생전에 진정한 신앙과 보헤미아 민족정신을 일깨우며 설교했던 틴교회당이다. 두 개의 첨탑이 우뚝 솟은 틴교회당은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욕망의 화신들’에 맞서는 인간들과 요정들의 요새 ‘미나스티리스’(감시자의 탑이라는 뜻)의 정수리처럼 빼어나다. 틴교회당의 광장 건너편엔 옛 시가지의 명물 시계탑이 있다. 매일 정오가 되면 수많은 구경꾼 머리 위에선 모래시계 주위로 12개의 인형이 도는 짧은 공연이 펼쳐진다. 해골은 죽음을, 모래시계는 ‘유한한 인생’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그 시계탑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원히 살 듯이 신과 인간을 동시에 욕보이는 ‘욕망의 전차’는 왜 속도를 더 내는 것일까.


                                                               얀 후스


얀 후스의 동상 아래엔 그가 화형당하던 순간 외쳤다는 ‘진실의 7명제’가 쓰여 있다.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


사람들은 열매에만 목을 매지만 뿌리와 줄기가 없는 열매는 없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은 얀 후스라는 줄기 위에 열린 열매였다. 후스는 체코말로 ‘거위’란 뜻이다. 후스는 화형당하면서 “너희가 지금 거위를 불태워 죽이지만 100년 뒤 나타난 백조는 어쩌지 못할 것”이란 말을 해 루터의 등장과 종교개혁을 예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때마침 국내에선 발레 <백조의 호수>를 영화화한 <블랙스완>(흑조)이 상영중이다. <블랙스완>에서 악(흑조)은 나 이외의 그 누가 아니었다. 영화에서 내털리 포트먼이 분한 발레리나 니나가 자기도 모르게 악을 제거하기 위해 찌른 것이 실은 자신이었다. 백조는 누구이고, 흑조는 누구인가. 결국 ‘욕망의 흑조’와 ‘순수의 백조’는 모두 니나의 내면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얀 후스의 동상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그가 죽음으로 항전했던 가톨릭의 대성당이 아니라 ‘자신의 아성’인 틴교회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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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존경하는 한겨레의 조현 종교 전문 기자가 2011년 3월 한달 동안 '기독교 개혁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훌륭한 기독교 기획 기사를 써내셨습니다. 루터와 칼뱅부터 시작해 현재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까지 총체적으로 짚어낸 좋은 기획 기사 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읽으셨으면 하는 바람에 제 블로그에도 올려 봅니다.

한겨레 신문 기사 원문 링크

1.루터의 외침, 부패한 교회를 일깨우다. -
http://bit.ly/fMaI0H

2.화형장의 후스, 종교개혁 불씨 되다. -http://bit.ly/gD4IHh

3.개신교 반석위에 올려놓고 교회의 소금으로 http://bit.ly/gEODGT

4. ‘오직 성서·믿음·은총’의 독 탓에 교회가 죽었다. -http://bit.ly/gD20Oh


루터의 외침, 부패한 교회를 일깨우다 ‘면죄부 판매’ 교권에 반기들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
‘파문’에 굴하지 않고 개혁 추진

[기독교 개혁의 발자취 그 현장을 찾아서] ① 루터, 진리의 사괴나무를 심다.
-한겨레 신문, 조현 기자.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 500돌(2017년)을 앞두고 ‘교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로 돌아가고자 했던 ‘종교개혁’의 의미를 기리려는 한국 교회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 교회의 얼굴로 꼽히는 대형 교회들에서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비리와 싸움, 개신교 최대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총 연합회(한기총)의 ‘돈선거’ 등으로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목소리들이 높아지며 ‘종교개혁 정신’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때마침 얀 후스,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츠빙글리 등 개혁가들의 흔적을 찾아나선 경기도 용인 죽전 새에덴교회(담임 소강석 목사)의 ‘종교개혁지 순례’에 함께했다. 개신교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의 삶을 몇차례에 걸쳐 되살펴본다.

가톨릭 사제이자 비텐베르크대 성서학 교수였 던 루터가 독일 황제의 소환을 받고 보름스에 도착해 제국회의장에 선 것은 1521년 4월17일이었다.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성교회에 붙인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 700여㎞. 한 달은 걸어야 할 거리다.


                          1517년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비텐베르크성교회.

왜 그는 험난한 길을 자처했을까. 비텐베르크성교회를 찾는 연간 20만명의 순례객들에게 루터의 사상을 전하는 벤 하르트 구룰(75) 가이드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로 돌린 것, 그것이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 인은 돈을 주고 산 면죄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義)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을 ‘성서를 통해’ 깨달은 루터는 면죄부를 판 교권에 맞서 ‘성서의 진리’를 전하려 했다. 그곳에 갔다가 체코의 얀 후스(1372~1415)처럼 화형당할지도 모른다며 극구 말리는 동료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길을 나섰다.

“얀 후스는 불태웠을지 몰라도 진리는 불태우지 못했소. 지붕의 기와만큼이나 많은 악마들이 있더라도 나는 보름스에 가겠소.”

독일 내 ‘3대 바로크양식 건물’ 이라는 보름스대성당은 ‘죄 많은 인간’을 초라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용과 권위를 갖췄다. 500년 전 보름스 인구는 6천명이었지만, ‘루터의 재판정’엔 무려 1만명이 모였다고 한다. 심약하기만 했던 루터가 대성당의 황제와 수많은 군중들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었을까?


성당 들머리 계단엔 예닐곱명의 가톨릭 수도사들이 평화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 우연히도 면죄부 판매의 선봉장으로 루터를 격발하게 했던 수도사 요한 테첼이 소속됐던 도미니크수도회 수도사들이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대로 테첼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상자에서 돈소리가 나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난다”며 면죄부를 팔았던 인물이다. 500년 전 가톨릭의 부패상을 상징했던 테첼의 후예들에게선 오히려 그런 악취는 풍기지 않는다. 이국의 순례객을 반갑게 맞아주는 필립 수사의 해맑은 웃음 어디에도 ‘권위적인’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만약 이곳 보름스 회의장에서 목숨을 건 루터의 이런 외침이 없었다면 분열의 아픔을 만회할 만한 정결함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내 양심이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한 나는 내 발언을 취소할 수도 없으며, 취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이롭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길. 아멘.”


면죄부를 팔아 모은 돈을 흥청망청대는 로마 교황청과 새로 지은 성베드로 성당을 장식하기 위해 쓰는 것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사제로서 삶이 몰수당하는 파문을 당했음에도 루터는 개혁을 향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자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끊임없이 나약해지는 자신의 용기와 정의를 북돋워 오늘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은 의지의 인간이었고, 일평생 자신의 죄를 고백한 회개의 인간이었다.

우리에게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의 말로 알려진 사과나무 명언도 실은 그보다 100년도 전에 마르틴 루터가 청소년 시절 일기장에 적은 말이라고 한다. 음악가 바흐(1685~1750)의 고향이자 루터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독일 중부 아이제나흐의 루터하우스 앞엔 나무 한 그루와 함께 이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네가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을 할지라도 나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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