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존경하는 한겨레의 조현 종교 전문 기자가 2011년 3월 한달 동안 '기독교 개혁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훌륭한 기독교 기획 기사를 써내셨습니다. 루터와 칼뱅부터 시작해 현재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까지 총체적으로 짚어낸 좋은 기획 기사 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읽으셨으면 하는 바람에 제 블로그에도 올려 봅니다.

한겨레 신문 기사 원문 링크

1.루터의 외침, 부패한 교회를 일깨우다. -
http://bit.ly/fMaI0H

2.화형장의 후스, 종교개혁 불씨 되다. -http://bit.ly/gD4IHh

3.개신교 반석위에 올려놓고 교회의 소금으로 http://bit.ly/gEODGT

4. ‘오직 성서·믿음·은총’의 독 탓에 교회가 죽었다. -http://bit.ly/gD20Oh


루터의 외침, 부패한 교회를 일깨우다 ‘면죄부 판매’ 교권에 반기들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
‘파문’에 굴하지 않고 개혁 추진

[기독교 개혁의 발자취 그 현장을 찾아서] ① 루터, 진리의 사괴나무를 심다.
-한겨레 신문, 조현 기자.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 500돌(2017년)을 앞두고 ‘교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로 돌아가고자 했던 ‘종교개혁’의 의미를 기리려는 한국 교회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 교회의 얼굴로 꼽히는 대형 교회들에서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비리와 싸움, 개신교 최대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총 연합회(한기총)의 ‘돈선거’ 등으로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목소리들이 높아지며 ‘종교개혁 정신’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때마침 얀 후스,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츠빙글리 등 개혁가들의 흔적을 찾아나선 경기도 용인 죽전 새에덴교회(담임 소강석 목사)의 ‘종교개혁지 순례’에 함께했다. 개신교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의 삶을 몇차례에 걸쳐 되살펴본다.

가톨릭 사제이자 비텐베르크대 성서학 교수였 던 루터가 독일 황제의 소환을 받고 보름스에 도착해 제국회의장에 선 것은 1521년 4월17일이었다.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성교회에 붙인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 700여㎞. 한 달은 걸어야 할 거리다.


                          1517년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비텐베르크성교회.

왜 그는 험난한 길을 자처했을까. 비텐베르크성교회를 찾는 연간 20만명의 순례객들에게 루터의 사상을 전하는 벤 하르트 구룰(75) 가이드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로 돌린 것, 그것이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 인은 돈을 주고 산 면죄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義)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을 ‘성서를 통해’ 깨달은 루터는 면죄부를 판 교권에 맞서 ‘성서의 진리’를 전하려 했다. 그곳에 갔다가 체코의 얀 후스(1372~1415)처럼 화형당할지도 모른다며 극구 말리는 동료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길을 나섰다.

“얀 후스는 불태웠을지 몰라도 진리는 불태우지 못했소. 지붕의 기와만큼이나 많은 악마들이 있더라도 나는 보름스에 가겠소.”

독일 내 ‘3대 바로크양식 건물’ 이라는 보름스대성당은 ‘죄 많은 인간’을 초라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용과 권위를 갖췄다. 500년 전 보름스 인구는 6천명이었지만, ‘루터의 재판정’엔 무려 1만명이 모였다고 한다. 심약하기만 했던 루터가 대성당의 황제와 수많은 군중들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었을까?


성당 들머리 계단엔 예닐곱명의 가톨릭 수도사들이 평화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 우연히도 면죄부 판매의 선봉장으로 루터를 격발하게 했던 수도사 요한 테첼이 소속됐던 도미니크수도회 수도사들이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대로 테첼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상자에서 돈소리가 나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난다”며 면죄부를 팔았던 인물이다. 500년 전 가톨릭의 부패상을 상징했던 테첼의 후예들에게선 오히려 그런 악취는 풍기지 않는다. 이국의 순례객을 반갑게 맞아주는 필립 수사의 해맑은 웃음 어디에도 ‘권위적인’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만약 이곳 보름스 회의장에서 목숨을 건 루터의 이런 외침이 없었다면 분열의 아픔을 만회할 만한 정결함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내 양심이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한 나는 내 발언을 취소할 수도 없으며, 취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이롭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길. 아멘.”


면죄부를 팔아 모은 돈을 흥청망청대는 로마 교황청과 새로 지은 성베드로 성당을 장식하기 위해 쓰는 것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사제로서 삶이 몰수당하는 파문을 당했음에도 루터는 개혁을 향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자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끊임없이 나약해지는 자신의 용기와 정의를 북돋워 오늘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은 의지의 인간이었고, 일평생 자신의 죄를 고백한 회개의 인간이었다.

우리에게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의 말로 알려진 사과나무 명언도 실은 그보다 100년도 전에 마르틴 루터가 청소년 시절 일기장에 적은 말이라고 한다. 음악가 바흐(1685~1750)의 고향이자 루터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독일 중부 아이제나흐의 루터하우스 앞엔 나무 한 그루와 함께 이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네가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을 할지라도 나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



Posted by @TellYouMore 박태인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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