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잊혀진 사람들이 있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은 확인된 숫자만 8만 3천여 명의 한국인을 납치했다. 2번의 정상회담과 남북한의 수많은 교류가 있었지만 아직 납북자에 관한 남한과 북한이 진지한 논의는 없었다.

납북자의 송환을 외치는 이미일씨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를 운영 중이다. 그녀는 납북자를 잊는 한국 사회를 거대한 어둠과 망각이라 말했다. 한국 언론이 외면한 이 사실을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길.


외신번역프로젝트가 돌아왔다. 많은 사랑 부탁드린다.
원기사: http://nyti.ms/uCfIQ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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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한국인 8만 3천 명의 이름을 부르다.
뉴욕타임스 국제판 2011년 11월 26일 자 기사.

By Choe Sang Hun
번역: 이기은(@Lazynomad)

*이미일씨는 한국 정부에게 북한에 납치당한 8만 3천명의 한국인 송환을 요청하고 있다.
출처:뉴욕타임스 사진: Woohae Cho


서울 - 최근 서울 도심에서 이미일 씨와 몇몇 사람들이 교대로 마이크를 들고 끝없이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침부터 부르기 시작한 이름들은 해가 지고 밤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얼굴 없는 이름들 하나하나, 8만 3천 명 모두의 이름이 울려 퍼져 서울의 번잡한 거리의 소음에 섞여 들어갔다.

몇몇 젊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이 특이한 시위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수십 년에 걸친 이미일 씨의 투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일 씨는 지난 2000년 전부터, 60년 전 한국 전쟁에서 북한에 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만 명의 한국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캠페인을 해왔다. 이미일 씨는 정부가 아직 살아있을지 모르는 납북자들과 이미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 반환 및 복귀를 위해 협상하기를 촉구해왔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한 번도 이 문제를 중요 사안으로 다룬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이 문제가 북한 핵무기 폐기와 같은 다른 더 중요한 사안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미일(62) 씨는 포기하지 않고 최근까지도 그녀가 '거대한 어둠과 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항하여 크고 작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전쟁 중에 납북된 사람들의 흑백 사진이 벽에 가득한 이미일 씨의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들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더는 이들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았으면 합니다."

1950 년부터 1953년까지의 전쟁에서 북한군은 수만 명의 한국인, 특히 공무원, 교육자, 작가, 판사, 목사, 사업가들을 납치해갔다. 대부분이 남자였다. 그 중 몇몇은 일제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초창기 한국을 건설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여 교과서에 실린 사람도 있다. 정부와 가족들의 이야기로는 북한이 납치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전후 재건을 위해 부족한 전문가 계급을 데려오고, 반공주의자 또는 우익 단체와 같은 그들의 적을 분열 와해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납치했다.

서울에 공장을 소유하고 있던 이 씨의 아버지가 납치되었을 때, 이 씨는 척추를 다친 18개월 된 아기였다. 이미일 씨는 당시의 척추 부상으로 지금도 등이 구부러져 있다.

이미일 씨는 135 센티미터의 신장에 탁하고 갈라진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미소가 좀처럼 그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공습 때 내가 지하 방공호에서 쉬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성대를 다쳤습니다."

1953년 미군과 북한군이 휴전했을 때 전쟁 포로를 교환했는지만 납치된 시민은 교환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납북자와 그 가족의 슬픔은 옛 대중가요에 남아있다.

*원문엔 노래의 일부만 실렸지만 번역문에는 노래 전문을 싣는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떠난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못뜨고 헤매일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꼭꼭 묶인채로

뒤돌아보고 또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많은 미아리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넘던 이 고개여 한많은 미아리고개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 이해연,  작사: 반야월, 작곡: 이재호

그러나 냉전 시대의 남한 독재 정권 아래에서 여성의 거리 시위는 금지되었다. 정부는 북한이 납북자들의 가족을 간첩으로 보낼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감시하였다. 납북자의 자식들은 안기부에 끌려가 배신의 증거를 찾기 위해 조사를 받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많은 전쟁 세대의 사람들이 북한과 협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렸고, 젊은 세대들의 관심은 희미해졌다. 많은 가정이 그들의 가족을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거나, 납북피해 진상규명 활동 때문에 북에 있는 가족이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자녀 없이 이혼한 이미일씨는 2000년에 서울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다가 긴 침묵을 깨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첫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했다. 후에 남북 정부가 이산가족상봉을 추진했을 때 납북자는 또다시 상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듬해, 남한은 북한의 인도적인 제스처를 기대하며 수십 억 달러를 지원했다. 하지만 북한 정부는 북한에 있는 납북자들은 자발적으로 귀순한 것이라 주장하며 실종된 한국인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친지와의 교류도 허락하지 않았다. 북한은 이 씨의 활동을 '과격한 정치 도발'이라고 일컬었다.

이씨는 "그들은 절대 납치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범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만 우리가 모두 죽고 이 일이 잊히길 바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2000년에 이미일씨는 운영하던 보육원을 접고 700 가정을 모아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를 설립했다.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2002년에 납치된 83,000명의 이름이 적힌 1,952건의 정부 문서를 발견했다. 이것은 전시 예비 편집본으로 관계자들이 그 존재를 부인했던 것으로, 정부 문서보관소에서 먼지 덮이고 분류되지 않은 것을 모은 것이다.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웹 사이트에, 죽으면 곧 잊혀버릴 나이 든 아내와 어머니들의 직접 겪은 전쟁 이야기를 인터뷰한 영상을 올렸다.

지난 해,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7년 동안 진정을 넣은 결과 입법자들이 최초로 전시 납치에 대한 정부 조사를 위임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지난 8월에는 정부 위원회에서 55명을 납북자로 인정하였다. 4년간의 조사기간 동안 이러한 법안이 더 많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미일 씨에게 있어서 이러한 정부의 인식은 북한에 의한 '제도적인 전쟁 범죄'를 입증하는 첫걸음이다.

한국 정부는 공산군과 인민군이 전쟁 동안 약 59,000명에서 122,800명의 남한 민간인을 죽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정부 조사로는, 한국군과 경찰은 이와 유사하게 좌파로 의심받는 자국민 학살을 저질렀다. 북한에서 자행된 대규모 처형에서 몇 명이 죽임을 당했는지는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나 북으로 진군했던 짧은 기간 동안, 미군과 한국군은 공산주의자들이 급하게 퇴각하면서 학살한 여자와 아이, 민간인들의 무덤군을 발견했다.

그리고 납북된 한국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한 밝혀지지 않았다.

전쟁 중에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탈출한 김영일 씨는 '죽음의 행렬'에 끌려간 한국인 3,000명 중 600명은 굶주림, 질병, 공중 폭격에 희생되어 살아남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미일 씨는 "젊은이들은 오늘날 그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가 이 잊혀진 이들의 희생 위에 존재하는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망각은 배은망덕한 것이요, 가장 나쁜 죄악입니다." 라고 말했다.

올해, 몇몇 정부 각료들이 납북자 가족 위원회에서 인식 제고를 위해 나눠주는 물망초 모양의 푸른 배지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미일 씨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정치적 감시와 고국에서의 가난을 피해 이주한 미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들은 납북자 송환을 위한 미국 의회 결의안 채택을 호소하고 있다.

이미일 씨는 "미국이 한국 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지켜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우리는 휴전 회담에서 납북자들의 석방에 실패한 것에 실망했습니다. 많은 납북자 가족들이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 문제는 미국의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4월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개최한 국군포로∙납북자 이름 부르기 캠페인에서, 이미일씨의 어머니 김복남(89) 씨가 제일 첫 번째로 마이크를 잡았다. 김복남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살아있다면 올해 91세가 되었을 남편 이성환 씨의 이름을 불렀다.

김복남 씨는 재혼하지 않았다. 김복남 씨의 세 딸 중 두 명이 미국으로 이민 갔지만 김복남 씨와 이미일 씨는 예전에 살던 집에서 계속 지내고 있다.

이미일 씨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온다면 이 집으로 오실 것이라고 믿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이미일씨가 운영 중인 6.25전쟁납북인사가협의회 바로가기 -http://www.625.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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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감수:  박태인 (@TellYouMore)



트위터 외신 프로젝트팀 드림. 
기사 편집자 및 주 번역자: 박태인 (@TellYouMore)

번역자문 및 감수 위원단: 김민주(@Spring_llullaby) 이기은(@lazynomad), 이호준(@DanielHojoon), 조효석(@promene), 서규화(@nicefairy_), 진소연(@Dal_Fishing713), 이자연(@jayeon22), 여동혁(@Tonghyeo), 김가현 (@HelloKaHyun) 박현태(@underbaron) 



원 기사 작성 기자: Choe Sang Hun
기사 원본 및 사진 출처: 
http://nyti.ms/uCfIQ2
출처: NYTIMES.COM
번역: 트위터 외신 번역프로젝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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