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책상에 앉아 이메일을 확인하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멘션들에 답한다. 품이 들지 않고 당장 처리할 수 있는 일을 해치워 버리며, 소셜미디어를 통해 뉴스를 확인하고 마음에 드는 트윗을 리트윗한다. 세상이 나의 통제에서 돌아가는, 순간이나마 나를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바로 이 느낌과 쾌락. 하지만 여기엔 댓가가 있다.


우린, 상대방과 눈을 맞이하며 소통하고 듣고 대화하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지 또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되지 않은 시간, 즉 고독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배울 수 있는 삶을 견디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MIT 심리학과의 셰리 터클 교수가 뉴욕타임스에 시기 적절한 칼럼을 기고했다. 그녀는 과도하게 연결된, 그리고 대화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적했다.


외신번역프로젝트가 돌아왔다. 많은 사랑 부탁드린다.
원기사: http://nyti.ms/JhTwlH

*기사에 대한 의견을 댓글로 적어 주시면 정말 감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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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에서 멀어지다.
뉴욕타임스 미국판 12월 14일 자 면 기사.

By SHERRY TURKLE (MIT 심리학과 교수)
번역 BY 이자연(@yeonfeel_)

*편집자 주: 무한히 연결 되는 기분, 그 쾌락과 자극 앞에 우린 고독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일까?



우리는 첨단기술 속에서 살아가고 또 항상 그 속에서 소통한다. 그리고 우린 고작 ‘연결’되기 위해서 ‘대화’를 포기해버렸다.

집에서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문자를 보내고 이메일을 확인한다. 직장이라고 다르지 않다. 경영진들이 간부 회의를 하는 도중 문자를 보낸다. 우리는 수업시간 중에도 또 데이트를 하는 중에도 문자를 한다. (쇼핑을 하면서 페이스북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리고 난 제자들한테 중요한 새로운 기술에 대해 전해 들었다. 대화 상대와 눈을 맞추면서 다른 사람에게 문자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렵지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지난 15년 동안, 나는 모바일 연결 기술에 대해 공부했다. 또 다양한 연령층, 다양한 환경에 속해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플러그 인’되어 있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대부분의 소형 기기들이 너무나 강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기들은 우리가 무얼 하는지만 바꿔 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마저도 바꿔 놓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함께하면서 각자’ 있는 새로운 방식에 익숙해졌다. 기술이 가능하게 했다.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어디에서나있을 수 있고, 어디에서든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연결될 수 있다. 우리는 어디든 움직이길 원한다, 우리가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은 우리의 신경을 집중하는 곳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파묻혀 있는 것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

회사 동료들은 간부 회의에 참여하고 싶어 하긴 하지만 오로지 자신이 관심 있는 것에만 집중한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좋은 생각인 듯 보이지만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피해 사라져버릴 수 있다. 그 누군가와 계속 연결되어 있더라도 말이다.

한 회사원은 더 이상 직장 동료가 없다는 사실에 슬퍼한다. 그는 잠깐의 대화를 하지도 전화를 하지도 않는다. “다들 수많은 이메일을 받고 그것들 때문에 정신 없어요”라며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잠시 후 정정한다.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내가 방해 받기 싫은 거예요.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대신 블랙베리를 통해 소통하죠.”

거의 모든 이야기를 문자로 하는 16살 소년은 아쉬운 듯 이야기했다. “어느 날, 그러니까 지금이 아닌 어느 날,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는 지 배우고 싶어요.”

요즘 직장에서는 이어폰을 꼽은 채 일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란 젊은 이들이다. 대학 도서관이나 첨단 기술들이 도입된 캠퍼스를 둘러보면,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함께 있지만 모두 자기만의 비누방울 속에 들어가 있다. 키보드와 작은 터치 스크린을 통해 그야말로 ‘미친듯이’ 접속하고 있는 것이다. 보스톤 로펌에 있는 한 선배는 사무실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젊은 직원들은 자신의 기기 셋트를 펼쳐 놓는다고 말이다. 노트북, 아이팟, 그리고 여러 개의 핸드폰을 꺼내 놓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어폰을 꼽는다. "빅원(Big Ones)같아. 비행기 조종사 같기도 해. 책상을 조종석으로 바꿔버리는 거지.” 각자의 조종석에 들어 앉아 있는 젊은 변호사들과 함께 하는 사무실은 조용해. 그리고 모두가 그 침묵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지.”

사람들은 ‘연결’로 인한 침묵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연락하며 편안함을 느낀다. 조심스래 구석에서 지내는 것이다. 만일 통제할 수 있을 만한 거리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누군가와 충분히 가까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내 생각에는 이것이 골디락스 효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골디락스 효과: 너무 크거나 너무 작지 않기 때문에 결과가 성공적인 경우 사용하는 신조어.

문자를 보내고 이메일을 하고, 그리고 포스팅을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선물하도록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 자신의 시간과 모습을 편집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한다면 지워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수정이라도. 목소리나 피부, 얼굴, 몸매 같은 것들을 너무 지나치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딱 적당한 선으로 말이다.

인간관계는 복잡하다. 어지러우면서도 부담스럽다. 그런데 우리는 기술을 통해 그것들을 청소해 버리는 습관을 배웠다. 대화에서 연결로의 이동이 그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과정이다. 더 심각한 점은, 우린 점점 더 기술로 연결되는 것과 대화를 통해 사람과 소통하는 차이점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잠깐이지만 인터넷을 들락날락하는 것 때문에 현실에서의 대화의 큰 부분을 통으로 날려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메일,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모든 것이 그들이 생활하는 모든 곳에 연결되어 있다. 정치나 광고, 사랑, 그리고 우정에서도 말이다. 하지만 SNS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모르지만, 분명 그것들이 대화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인터넷에 들락거리는 것은 별개의 정보 조각들을 모으거나 “지금 네 생각하고 있어”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니면 “사랑해”라는 이야기?! 하지만 들락거리는 것으로는 누군가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을 잘 할 수 없다. 대화를 하면서는 상대방에게 집중할 수 있다. 대화라는 단어 자체가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움직이고 함께한다는 것에서 유래했다."우린 말투와 억양과 같은 뉘앙스를 알아들을 수 있다. 대화를 통해서 우린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면대면 대화는 천천히 펼쳐진다. 이를 통해 인내를 배울 수 있다. 디지털 기기를 통해 소통할 때는 다른 습관이 나온다. 소리를 키우고 인터넷 속도를 증가시키면서 더 빠른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상대방에게 소통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킬 정도의 간단한 질문을 하는데, 심지어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태도를 보인다. 모든 뉴스를 인터넷을 통해 보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셰익스피어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 길들여진다."

게다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 스스로와 대화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대화를 회피하는 것은 자신을 되돌아 보는 방법을 배울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요즘, 소셜 미디어들이 지속적으로 묻는 것이 바로 무엇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가 이다. 하지만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이야기할 동기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대화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믿음이 필요하다. 3천 명의 페이스북 친구들과 ‘접속’을 제외하곤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대화를 점점 적게 하고 얻는 것 역시 점점 줄어들자 우린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략하고 있다. 진지한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로서의 컴퓨터 프로그램의 미래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다. 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내게 털어놓았는데, 그는 데이트에 대해 아버지가 아닌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인공지능은 그 안에 수많은 데이터 베이스를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상황을 애플사의 아이폰의 음성인식 도우미인 시리에 바라는 바라고 했다. 시리가 점점 더 발전하면 ‘그녀’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갈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아도 내 말을 들어주는 가장 가까운 친구 말이다.

수 년 동안 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연구해 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이러한 감정이 왜 페이스북 페이지나 트위터 피드를 개설하는 것이 매력적인지를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둘 다 자동적으로 듣는 사람들을 꽤 많이 제공해 주고 있다. 또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돌보는 듯 보이는 기계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지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연구원들은 사회적인 로보트를 개발하느라 바쁘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동료가 되도록 디자인 된 로보트 말이다.

연구를 하면서 가장 잊을 수 없었던 경험은 내가 아기 바다표범처럼 생겼고 노인들을 보살피는 기능을 가진 로봇 중 하나를 가져왔을 때였다. 한 노인 여성은 이 로봇에 대고 그녀의 아이를 잃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로봇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대화에 발 맞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여성은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놀라움을 경험했다. 인공지능에게 데이트 조언을 듣고 싶어했던 2학년 학생과 컴퓨터 정신과 의사를 기대했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 말이다. 이러한 열정은 우리가 얼마나 대화와 연결을 혼동해 왔는지 이야기 해준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하루 종일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 줄 것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환상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 우리는 왜 사랑과 이별에 대해 인간 삶의 굴곡을 겪어보지도 않은 기계랑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우리는 상대방을 위해 있어주는 것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일까?

우리는 기술에 더 기대하고 상대방에게 덜 기대한다. 그리고 인간관계 없는 동료애에 대한 환상을 주는 기술에 끌리는 것이 점차 증가하는 것 같다. 항상 접속해 있고, 나에게 접속해 있기도 한 기기들은 세 가지 강력한 환상을 준다. 항상 내 말을 들어주고, 어디에서든지 우리가 원한다면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이고, 우리는 절대 혼자인 적이 없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새로운 기기들은 풀릴 수 있는 문제들 속에서 혼자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단 몇 분이라도 혼자일 때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기기를 찾는다. 이러한 연결은 치유가 아닌 일종의 증상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끊임없는 연결에 대한 반사 자극이 새로 형성된다.

“나는 공유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이 생각해 보라. 우리는 생각과 감정을 공유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정의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전화하고 싶다는 감정이 있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제 우리의 자극은 “감정을 갖고 싶어. 문자를 보내야 한다라는 감정”이다.

더 자세히 느끼기 위해, 그리고 더 우리 자신과 같이 느끼기 위해 연결한다. 하지만 이런 연결의 서두름 속에서 우리는 고독으로부터 도망치게 된다. 다른 사람과 떨어져 스스로 있을 수 있는 능력에서부터 말이다. 고독을 견딜 수 없는 능력의 부족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된다. 우린 다른 사람들을 향해 다가가지만, 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는 지속적인 연결이 덜 외롭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반대가 정답이다. 혼자일 수 없다면, 우리는 더 많이 외로울 것이다. 만일 우리 아이들에게 혼자 있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다면, 아이들은 어떡하면 외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대화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이다. 대화를 위해 방을 만들자 몇 가지 의도적인 과정들을 볼 수 있었다. 집에서, 우리는 성역의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예를 들면 부엌이나 거실과 같은 공간이다. 차 안을 ‘기기가 없는 공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대화의 가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직장에서도 똑같이 할 수 있다. 직장에서 우리는 대화하기에는 너무 바빠서 무엇이 정말 문제인지에 대해 상대방과 대화할 시간이 없다. 고용인들이 여유로운 금요일을 요구하면, 아마 매니저들은 대화하는 목요일을 소개할 것이다. 대부분, 우리는 문자와 이메일, 그리고 페이스북 포스팅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기억해야 한다. 심지어 지루할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종종 편집되지 않은 순간들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망설이고 더듬는, 그리고 조용해지는 그 순간들은 상대방에게 우리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캐이프 코드에 있는 한 작은 집에서 여름을 보냈다. 그리고 수 십 년 동안 똑 같은 사막을 걸었다. 소로 헨리 데이비드가 걸었던 그 길 말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에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걸었다. 물을 보고 하늘을 보고, 모래와 상대방을 바라보며 대화를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종종 고개를 숙이고 타이핑하면서 걷는다. 심지어 그들이 친구, 애인, 아이들과 있더라도 그들의 기기 속에 모두가 있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고개를 들고, 상대방을 바라보라고. 그리고 대화를 시작하자고.

*기사 추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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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감수:  박태인 (@TellYouMore)



트위터 외신 프로젝트팀 드림. 
기사 편집자 및 주 번역자: 박태인 (@TellYouMore)

번역자문 및 감수 위원단: 김진영(@Go_JennyKim), 김민주(@Spring_llullaby), 이기은(@lazynomad), 이호준(@DanielHojoon), 조효석(@promene), 서규화(@nicefairy_), 진소연(@Dal_Fishing713), 이자연(@), 여동혁(@Tonghyeo), 김가현 (@HelloKaHyun) 박현태(@underbaron) 



원 기사 작성 기자: 
SHERRY TURKLE
기사 원본 및 사진 출처: 
http://nyti.ms/JhTwlH
출처: NYTIMES.COM
번역: 트위터 외신 번역프로젝트팀



Posted by @TellYouMore 박태인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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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졸업을 앞두고 있다. 미국 동기들과의 대화에서의 중심 화두는 "누가 어디에 일자리를 잡았냐"라는 것이다. 많은 친구들이 어려운 경제 상황을 피해 대학원을 갔고, 정규직을 구하지 못한 친구들은 인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그리고 한국에서도 청년 실업은 심각한 문제다. 수치적으로 비교해 볼 떄, 한국 청년의 실업률이 비교적 낮은듯 보이지만, 전체 인구 중 청년 실업자의 비율과 임금 수준 그리고 고용 안정성의 문제를 꼼꼼이 따져보면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노벨 경제학 수상자 폴 쿠르그먼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 미트 롬니의 청년 교육 및 일자리 대책을 비난했다.



외신번역프로젝트가 돌아왔다. 많은 사랑 부탁드린다.
원기사: http://nyti.ms/JLbX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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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낭비
뉴욕타임스 미국판 4월 30일 자 오피니언면 기사.

By Paul Krugman
번역 by 박현태(@Underbaron)


스페인의 25세 미만 노동자 실업률은 50%가 넘는다. 아일랜드는 삼 분의 일의 청년들이 실업 상태이다. 여기 미국은, 청년 실업률이 “고작” 16.5%이지만 이것도 여전히 끔찍한 수치이다 -하지만 상황은 더 나쁠 수 있었다.

그리고 분명하게도, 많은 정치인이 이런 상황이 더 나아질 것이라 보장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다하는듯 하지만 사실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들어왔던 ‘여성에 대한 전쟁’이란 말들을 들어왔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전쟁뿐 아니라 청년에 대한 전쟁도 존재한다. 드러나지 않도록 위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그 전쟁 말이다. 그리고 이는 청년 뿐 아니라 나라의 미래에도 엄청난 해악을 끼치고 있다.

지난주, 미트 롬니가 대학생에게 주었던 충고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한 후 청중들에게 “한번 시도해보고, 도전하며, 위험을 감수하고, 교육을 받고, 필요하다면 부모님에게 돈을 빌려서, 사업을 시작해보십시오.”라고 말했다.

이 말에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롬니의 접근 방식이다.-부유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 즉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은행에 의존하여 자신의 야망을 위해 융자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공감력의 현저한 결여가 돋보인다. 그러나 나머지 발언 또한 그 나름의 방식대로 나쁘기는 마찬가지다.

"교육을 받고."라는 그의 말에 그 교육비는 어떻게 내란 말이냐? 주 정부의 원조 예산 삭감으로 공립 단과대학과 종합 대학교의 등록금은 치솟았다. 롬니는 이를 시정할 어떠한 것도 제안하지 않았다. 그는 연방 학생 지원 예산을 급격히 감소시켜 약 백만 명의 학생들이 *펠그랜트를 받지 못하는 사태를 야기한 라이언 예산 안에 강력한 지지자였다.

*연방정부에서 지원하는 학자금 지원금

그래서 정확히 어떻게, 돈이 부족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교육을 받으라”는 건가? 지난 3월 롬니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단과대학을 찾으라고 말했다. 행운을 비는 바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롬니의 처방이 그가 태어나면서 가졌던 유복함을 지니지 못한 미국인에게 쓸모 없는 처방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분열을 초래하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리고 여기엔 더 큰 문제가 있다 : 비록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떻게든 엄청난 양의 빚을 지고 “교육받기”를 감내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을 원하지 않는 사회를 향해 졸업을 한다는 점이다.  

당신은 아마 대졸 학력의 노동자들이 현재의 경기 침체 상황에서 고졸 학력의 노동자들보다 보다 나은 생활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대학을 졸업한 미국의 중년층이 아닌 최근 대학 졸업자들 현실에 비춘다면 대학 졸업장은 훨씬 덜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대졸자들의 실업률은 최근 급격히 상승했다; 시간제 노동직도 마찬가지다; 이는 대졸자들이 정규직을 찾기 어려울 것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아마 대부분 정규직으로 일하는 대졸자들의 임금 또한 급락했을 것이다. - 이는 많은 대졸자가 자신들이 받은 교육을 전혀 쓸 수 없는 직장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취업을 한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대졸자들은 이제 취약한 경세 상황으로 인한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조사결과는 이렇게 지급된 비용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 불경기에 취업을 한 대졸자들은 손해를 회복하지 못한다. 감소한 그들의 수입은 평생 지속 된다는 것이다.

결국 청년들이 무엇보다도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나은 취업 시장이다. 롬니같은 사람들은 일자리 창출에서 그들만의 처방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업과 부자에 대한 세금을 감면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지출되는 공공 복지에 지출을 감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정책들이 어떻게 경제를 위축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수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일자리를 창출하기보단 없애버릴 것이다.

당신은 유럽의 경제위기를 지켜보면서, 현재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우리가 지금 실시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들을 모두 시행해온 유럽의 몇몇 국가들이 최악의 절망 상태를 경험하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얼마 전, 보수주의자들은 아일랜들의 경제 정책, 특히 낮은 기업세율에 대해 떠들어댔다.; 헤리태지 재단은 아일랜드에게 “경제적 자유도” 부문에서 다른 어떤 서양국가들보다 가장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러나 경기 상황이 안 좋아지자, 아일랜드는 또 헤픈 칭찬을 받게 되는데, 이번에는 경기 회복에 대한 확신감을 불러일으키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해줄 지출들에 대한 가혹한 삭감에 대한 찬사였다.

그리고 이제, 내가 말했던 대로, 거의 3분의 1의 아일랜드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의 청년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롬니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로 하면 된다. 정부는 학생들을 위한 보조금을 늘려야 하지 줄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상 미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정부의 정책을 뒤집어야 한다. -교육 여건을 특히 더 어렵게 하고 있는 주 정부와 지역 단위의 전례 없는 예산 삭감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 이런 식의 정책 전환은 물론 비용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출을 거부하는 것은 너무나 멍청한 일이며 순수하게 금융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지나치게 단기적인 관점이다. 우리는 젊은 세대들이 단순히 미국의 미래일 뿐 아니라 미래 납세의 토대가 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지나치게 높은 등록금과 취업난으로 인해)지성이 허비 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것이 모든 세대의 지성이라면 더 끔찍한 일이다. 이제 이런 짓은 그만두도록 하자.


*기사 추천 부탁드립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댓글로 적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번역 감수:  박태인 (@TellYouMore)



트위터 외신 프로젝트팀 드림. 
기사 편집자 및 주 번역자: 박태인 (@TellYouMore)

번역자문 및 감수 위원단: 김진영(@Go_JennyKim), 김민주(@Spring_llullaby), 이기은(@lazynomad), 이호준(@DanielHojoon), 조효석(@promene), 서규화(@nicefairy_), 진소연(@Dal_Fishing713), 이자연(@jayeon22), 여동혁(@Tonghyeo), 김가현 (@HelloKaHyun) 박현태(@underbaron) 



원 기사 작성 기자: Paul Krugman     
기사 원본 및 사진 출처: 
http://nyti.ms/JLbXU6
출처: NYTIMES.COM
번역: 트위터 외신 번역프로젝트팀


Posted by @TellYouMore 박태인 트랙백 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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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유인호 2012.05.13 15:47

    우리나라가 더 심각한 거 맞죠?

  2. addr | edit/del | reply 유인호 2012.05.13 15:49

    좋은 기사번역 감사합니다.

  3. addr | edit/del | reply 최동희 2012.09.11 12:23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제 페북에 링크 공유하고 소개해도 괜찮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