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에세이를 모으고 있다.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왜 투표하는지에 관해 묻고 그 이유를 나에게 보내달라고 말했다. 대세론과 심판론 그리고 인적 쇄신이라는 정당들의 허울뿐인 변화속에 개개인의 유권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했다.


당신은 왜 투표하는가? 이번 총선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무엇인가? 쓰고싶은 만큼의 분량을 적어 필자에게 보내주셨으면 좋겠다. Parktaeinn@gmail.com


"사실 에드먼드 벌크가 말한 이 한 구절이 나를 투표장으로 이끈다고도 할 수 있다. 선의 방관만이 악을 꽃 피운다”
(The only thing necessary for triumph of evil is for good men to do nothing)"



*박지호씨의 트위터 프로필 사진


By 박지호(@jh_justice)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시민권익센터 간사

경실련 홈페이지 바로가기www.ccej.or.kr


나는 왜 투표하는가: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의 정의와 안녕을 위해 투표를 한다.”

‘나는 왜 투표를 하는가?’ 라는 자문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 사실 자신이 사회에 의한 직접적 피해를 입기 전까지 투표장에 빠지지 않고 나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쉽사리 자신의 입장과 과거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공동체의 정의(justice)와 안녕을 위해 투표를 한다. 투박하다 못해 고루하기까지 한 대답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있는 정의란 단지 마이클 샌덜의 책 제목에 적힌 정의, 그리고 단어 자체의 정의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화 이후 10년 가까이 축적되어 온 ‘내가 정의(defined)내린 정의(justice)’를 의미하는 것이다(이를 설명하기엔 지면이 불필요하게 길어질 듯하여 생략한다). 나는 이 정의를 토대로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 그 구성원들이 안녕하길 바라며 투표를 하는 것이다.



사회적 배경

사회가 병들어 있다. 우리가 태어난 순간에도, 기초교육을 받던 사춘기 시절 그때에도, 고등교육을 받으며 취업에만 몰두하고 있던 그 순간에도 사회는 병들어 있었다. 아니 더욱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병이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김상조 교수의 종횡무진 한국경제 특강.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있는 사회보다는 시장자본주의사회 속에서 자신을 조금 더 중요시하며 살아왔다. 사람들의 가치관을 획일적으로 만들고 타인에게 무관심한 개인주의를 팽배하게 하는 데는 시장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미 구조 자체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17대 대선과 18대 총선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많은 병들이 급속하게 악화되고 시작하였고 결국 그 고름이 터져 공동체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경제위기는 중산층의 몰락을 가져왔다. 경제가 파탄나자 국가는 성장일로의 정책을 택하기 시작하였다. 과거회귀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대의제 하에서 투표 참여를 통해 사회를 바로 잡고자 하는 사람들은 국가가 잘 살게 되면 그 구성원이 잘 살게 되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 효과, 이른바 ‘낙수효과’를 꿈꾸며 그런 국가에 힘을 실어 주었다.



*낙수효과의 진실은 무엇인가?


스스로 자신들이 입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정부와 국회를 점령한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국가의 정책은 거시적인 국가 경제와 신임도의 상승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결국 일부 대기업들과 경제적 기반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분노와 참여

나는 분노하였다. 정치외교를 전공하며 스스로 최상위 학문으로써 사회정의를 위해 유일무이한 요소와 수단으로 생각했던 정치가 오히려 사회를 망치는 부정적인 역할만을 도맡아서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미숙한 참여였다. 촛불이 모여 있는 곳으로 뛰어 나갔다. 하지만 처음 달려나간 날 그 자리에서 느낀 실망감에 하지만 그곳에서도 실망만을 안고 왔다. 개인주의가 팽배했던 사회 속에서 살았던 우리는 정당한 목소리를 내는 방법조차 알고 있지 못했다. 구호만 난무하고 비난만 늘어놓는 사람들은 결국 강제 해산되거나 연행되었다.



결국 나는 다시 이론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를 치료하고 공동체를 위한 국가를 만드는 방법은 투표 이외에 그 어떤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20대와 30대는 개인주의의 팽배 속에서 투표장으로 향하질 못하였다.



나는 진정한 참여를 꿈꾸었다. 그래서 학업을 마친 후 민간연구소를 거쳐 시민단체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곳은 나와 같은 이유가 아니더라도, 개인주의,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민주화 이후 경제성장과 정치적 외연성장 속에서 공동체의 안녕을 위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다.



작별과 만남



나는 지금 참여하고 있는 시민단체에서 새로운 정치참여를 깨닫게 되었다. 정치참여를 통해 사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우선 익숙한 것들과의 작별이 이루어져야 한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취업해야 해서’ 라는 핑계,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의 작별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잠시 내려놓고 공동체를 바라보며 투표에 참여해야한다.



이는 곧 새로운 정치와의 만남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 만남이 가져온 사회변화는 내려놓았던 나에게 다시 혜택으로 돌아온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왔다. 나는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나를 내려놓고 투표에 참여한다. 하지만 이 양보와 내려놓음은 곧 내가 만든 사회에 의해 다시 일으켜 세워진다.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글이 너무 엉망이라 내가 투표장에 나가는 이유를 이해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사실 Edmund Burke가 말한 이 한 구절이 나를 투표장으로 이끈다고도 할 수 있다.



“선의 방관만이 악을 꽃 피운다”
(The only thing necessary for triumph of evil is for good men to do no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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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에세이를 모으고 있다.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왜 투표하는지에 관해 묻고 그 이유를 나에게 보내달라고 말했다. 대세론과 심판론 그리고 인적 쇄신이라는 정당들의 허울뿐인 변화속에 개개인의 유권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했다.


당신은 왜 투표하는가? 이번 총선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무엇인가? 쓰고싶은 만큼의 분량을 적어 필자에게 보내주셨으면 좋겠다. Parktaeinn@gmail.com


"덜 나쁘다고 여기는 쪽을 향해야 하는 지긋지긋한 '차악적 선택'은 이번 투표에도 어김없이 내 심기를 괴롭히겠지만 장차 그리 되었으면 하는 공정한 사회를 그리며 작고 응달지고 신음하는 쪽에 내 신성한 표를 심고자 한다."


By  유용선 (@Homoscripto)

(저술가, 국어교육) 

유용선 씨가 교장 선생님을 맡고 계신 독서학교 사이트 바로가기 http://penguide.kr/



나는 투표의 힘을 믿을 수 없어 투표한다.


'이상향'이란 문자 그대로 너무 이상적이어서 완벽하게 현실로 구현되지 않은 곳을 뜻한다.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는 인간이 꿈꾸는 대표적인 이상향이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할 때의 그 국민은 어떤 때에는 보편타당한 슬기로운 감시자이지만 때로는 무언가에 현혹된 탐욕스럽고 우둔한 무리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그 아수라의 얼굴을 한 군중의 주권을 이상으로 삼는 무모한 사상이다.


숱한 사람과 숱한 조직이 민주주의를 표방한다. 나처럼, 혹은 내가 지도하는 학생들처럼 문학에 발을 걸치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 현상은 참으로 눈여겨볼 만하다. 거기 인간의 본성이랄 수 있는 아이러니와 부조리가 생생하게 숨을 쉬고 있으니까.


투표에서 국민투표로, 국민투표에서 우리나라의 국민투표로 이야기의 범위를 좁혀 보자.


대한민국 헌법이 국민투표 개념을 지니게 된 것은 1954년 제2차 헌법개정에서 주권의 제약과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중대사항을 결정하는 방법으로서 도입되면서부터이다. 이후 대한국민은 1962년12월 17일 최초로 국민투표를 치룬다. 알다시피 5.16 군사정변 다음해의 일이다. 그 후로 우리나라는 헌법을 고칠 때나 유지하고자 할 때 반드시 국민투표를 거친다. 지금은 너무나도 악명 높은 유신헌법도 국민이 투표로써 확정(1972년)하고 유지(1975년)시켰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이 행정 · 입법 · 사법의 3권 모두를 대통령에게 집중시킨 헌법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여타 다른 나라의 대통령(President)과 성격이 크게 달라진 결정적 계기가 된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투표가 민주주의의 상극인 독재를 공고히 하는 데 쓰인 것이다. 하긴 꽃의 용도가 감상만 있는 건 아니다. 투표가 적장의 시신에 얹힌 꽃이 된 경우라고나 할까. 암튼 이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민주주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번에는 국민투표 가운데 인물선출을 위한 투표, 즉 '선거'로 이야기의 범위를 한번 더 좁혀 보자. 
우리가 투표로 선출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직책은 국회의원이다. 국회의원은 법을 만들고 수정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놀랍지 않은가. 편법과 탈법의 대명사 같은 국회의원이 무려 법을 만들고 수정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국회의원을 선출할 때는 투표로써 법을 만들고 수정하는 일을 간접적으로 하는 셈이다.


직선제가 도입된 뒤로는 대통령도 직접 뽑고, 지방의회 제도가 설립되어 시, 군, 구 단위 지역의 장도 직접 뽑는다. 그런데 희한하다. 선거철에 나오는 후보들은 선거운동 기간에는 머슴인 양 굴지만 일단 선출되고 나면 어김없이 군림하려 한다. 후보만 그러면 다행인데, 뽑아준 작자들 또한 스스로 긴다. 봉건적인 상하 의식이 뿌리 깊어 선거철은 그저 억눌린 심정을 잠시 한풀이하는 기간 같다. 투표를 무기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이 마치 가시 몇 개로 호랑이도 맞서 싸울 듯이 구는 장미 같아 안쓰럽기 짝이 없다.


나는 투표의 힘을 믿지 않는다. 투표의 주체인 우리나라 사람들의 지혜와 순수를 아직(!) 믿지 않는다. 한미FTA 같은 중요한 사안을 국민합의 없이 이끌고 가서 발효시키는 정부도 믿을 수 없지만, 국민투표로 맡겨졌을 때 TV와 신문의 선동으로부터 자유롭게 스스로 공부하고 판단할 국민이 많으이라고도 믿지 않는다. 선거권이 20세부터라는 불합리도 모순 같아서 영 못마땅하다. 헌법 전문을 읽어보라. 우리나라는 유관순으로 애국을, 4.19로 정의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그 연령대 학생들은 선거권조차 없다. 이념과 생계에 물들지 않은 10대 후반의 깨끗한 눈이 참여하는 투표라면 지금보다는 진일보한 모습을 띨 텐데 하는 아쉬움이 늘 있다. 그들 연령과 늘 함께 생활하기에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투표의 힘을 믿지 못하여 더욱 열심히 투표에 참여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지금 바람직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입으로는 민주와 자유를 표방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말과 행위와 생각에 있어 봉건성이 가득하다. 게다가 남북한이 처음 분단될 당시와 상황이 크게 바뀐 지금에 와서조차 남과 북은 각각의 구성원을 광신적인 추종과 병적인 콤플렉스로 몰아넣고 있다. 양측의 권력 정점에 있는 이들은 그 광신과 콤플렉스로부터 자양분을 얻고 고목으로 뿌리를 내렸다. 이러한 생태는 바뀌어야 한다.


               진보신당 비례대표 1번으로 선정된 울산과학대 김순자 지부장. 출처:울산노동뉴스 


울산노동뉴스 김순자 지부장 인터뷰 바로 가기 ☞http://bit.ly/FTJwMa


생태계에선 돌연변이 소수가 멸종의 위기에 대처한다. 생태계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을 때에는 이 돌연변이가 생존에 더 적합해진다고 한다. 내가 하는 투표는 돌연변이의 지향성을 닮았다. 지금은 아니지만 장차 그리 되었으면 하는 이상향이 내 돌연변이 선택의 기준점이자 종점이다. 법률을 제정하거나 수정하려는 투표에서는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활기찬 방향을 지향하고, 인물을 선출하려는 투표에서는 정치적인 힘이 없어 억울한 상황을 겪는 소수자나 약자를 위해 현장에서 현장으로 뛰어다니는 봉사형 인물을 지향한다.


투표 성향이 그렇다 보니 육식동물처럼 비대해진 여당과 제1야당의 권력 주고받기에 보내는 내 시선은 평상시 그다지 곱지 못하다. 생경한 이념을 앞세우느라 정작 생활현장의 땀과 눈물과 피를 닦아주지 못해온 중간 크기의 세력도 별로 곱게 보지 않는다.


이번 선거에는 돌연변이 투표에 기쁨이 되는 일이 있어 흥미롭다. 진보신당에서 청소노동자가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다고 하니, 정당투표라는 제도를 잘 이용하면 소위 운동권이 아닌 실제 노동자 계급 출신 의원을 우리 사회가 획득(?)하게 하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할는지도 모르겠다. 가까이는 4월 총선이, 조금 멀리는 연말의 대선이 내 머릿속을 시끄럽게 하겠지만 짜증내지 않고 조금이라도 맑고 밝은 눈으로 돌연변이의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 덜 나쁘다고 여기는 쪽을 향해야 하는 지긋지긋한 '차악적 선택'은 이번 투표에도 어김없이 내 심기를 괴롭히겠지만 장차 그리 되었으면 하는 공정한 사회를 그리며 작고 응달지고 신음하는 쪽에 내 신성한 표를 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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